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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회고: 2023년을 보내며

코딩파이 2024. 1. 1. 18:30

#0.

입김이 나온다.

사실 23년 12월 31일의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아서 숨을 내 뱉어도 하얀 입김은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입으로 숨을 내뱉는 이유는 추운 날씨를 상기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가슴 속에 무거운 것들이 쌓여, 입으로라도 내뱉지 않으면 좀체 답답함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까지 무언가 가득 쌓인 탓에 차가운 바닷 바람이라도 맞으면 나을까 하여

부산 다대포의 공장과 바다가 펼쳐진 풍경을 눈으로 보고, 또 카메라에 담아봐도

기껏 정리한 머리카락만 헝클어 질 뿐이었다.

23년의 마지막까지 이만큼 비우려 노력해도 안 되는걸 알았으면

이제는 다시 채워갈 시간이 왔음을 느끼고 글을 적는다.

 

#1. 빛날 줄 알았으나 어두웠던

23년 상반기는 꽤나 빛났다.

그렇기 때문에 22년의 회고 핑계까지 대며 이뤄온 일들을 잔뜩 나열했다.

항상 영감과 위로가 되는 오랜 친구들과

인간적으로, 또 업무적으로 자극시키는 멋진 동료들 덕분에

23년에 목표한 것들을 상반기만에 대부분 해치웠기 때문이다.

결과를 얼만큼 이루었나 보다 반년이라는 시간을 잘 버텨온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그래서 23년 상반기 처럼만 지내면 하반기도 분명 빛날 것이라고,

22년의 회고와는 다르게 희망적인 글로 가득 찬 회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 큰 문제가 있었는가?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 너무나 게으르게 살아서 하반기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물론 상반기만큼 치열하게 지냈다고는 못하겠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 몇가지는 얼추 이루어낸 것 같았다.

그럼에도 텅 빈 것 같은 올해가 되는 이유가 있다면…

 

#2. 공허함은 천천히 찾아온다.

가장 길게 나를 괴롭혔던 이유는 아마 뚜렷한 목표들이 없어서가 싶다.

앞서 말했듯 운동, 공부(알고리즘) 과 같은 목표들은 상반기에 나름 꾸준히 해냈고

꾸준하게 실행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얻겠다는 기준은 없었다.

그래서 인지 언제부턴가

나는 이걸 왜 하고있지? 이걸 왜 해야하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아예 글을 따로 적겠지만

나는 올 해 초 즈음부터 개발자들의 성장 이라는 강박과 같은 단어에 질린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성장이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이 매번 머릿속을 멤돌았고

나름대로 혼자 혹은 동료들에게 이따금씩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명확한 해답은 얻지 못했었다.

이 상태로 계속 공부를 진행하니 공부가 잘 되지 않은 날은 잘 하지 못한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잘 된 날 조차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얻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상반기의 노력 덕에 공부 습관 자체는 어느 정도 만들어졌기에 공부를 멈추진 않았지만

공부할 수록 지식보다 잡생각이 머릿속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2월이 들어서 잡생각이 내 머릿속의 절반을 넘게 차지할 때 즈음

도저히 다른 관심사로도 머릿속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았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처럼 제 기능을 못함을 알게 되었다.

 

#3. 또,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한기가 가시기 시작할 내년 2월 즈음 지금 살고 있는 반지하 집에서도 계약이 끝난다.

아쉬움은 있어도 큰 불만은 없고, 나한테 꼭 맞는 (주방이 넓은) 집이었기에 이 집에 더 살지, 아니면 더 좋은 집으로 나갈 지 고민이 되었다.

결국 부동산 앱을 봐도 마땅찮은 집이 없던 차에 집주인분께 연장에 대해 여쭤보았더니 전세금을 슬쩍 올린다는 뉘앙스로 말해주신 덕분에 완전히 지금 집에 대한 미련을 접고 새 집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월세는 비싸다보니 전세, 특히 저렴한 중기청이나 버팀목을 고려하여 열심히 찾은 결과 내가 원하는 조건에 거의 부합하는 집을 찾게 되었다.

요즈음 전세사기로 세상이 시끄러운 탓에 사기를 당하지 않게끔 알아보고, 혹시나 안좋은 상황에도 돈을 받을 수 있게끔 모든 특약을 넣어 계약서를 작성후 계약 종료 2달 하고 며칠 더 남은 시점에 현재 집주인분께 말씀드렸더니

어디 임대인 학원에서 배우신 것 처럼 새 세입자가 오지 않으면 돈을 줄수 없다. 돈이 없다.

라는 대사를 말씀해주셨다.

덕분에… 몇 년간 고생하며 모은 나의 목표들을 뺏기지 않으려 몇날 며칠을 관련 법과 대응 방법에 대해 공부했다.

그렇게 지냈던 날들은 불안해서 밤에 잠이 들어도 몇 번씩 깨는 날 들이 반복되었다. 힘들 때 술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술을 채운 끝에 잠자리에 들었던 날들도 있었다.

다행히 우려하던 법적 싸움까지 가기 전에 돈을 주겠다는 뉘앙스로 현재 집주인분이 말씀해주셨고, 혹시나 현재 집주인분이 돈을 돌려주지 않을 때 대응 방안까지 새 집주인분과 어느정도 논의 한 끝에 사건을 일단락 되었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불안감과 함께

지난 몇 년간 돈이 목표였던 나에게 힘들게 모은 돈(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나에게 무엇이 남는거지?

이 돈으로 무언가를 하고싶은게 아닌데, 얼마의 돈을 다 모은다면 나는 이제 뭘 하면 되지?

같은 고민들이 잡생각으로 가득 차 제 기능을 못하던 머릿속의 남은 빈 공간마저 꽉 채워 나갔다.

 

#4. 채우려면

회고의 첫 줄을 적을 때에만 해도 24년의 시작은 새로운 목표들로 가득 채워 시작하려 했다. 텅 비워 보냈던 12월의 겨울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마지막을 적을 때 즈음 생각해보니 그렇게 마음 먹는다고 해서 내일 아침 당장 내 머릿속이 비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23년 회고는 새로운 계획보다는 약간의 바램과 함께 끝을 맺고,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든 정리된 시점에 간단한 후기와 함께 24년의 새로운 계획들을 채워볼까 한다.

아무튼,

지금 걱정하는 많은 일 들이 별 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24년은 행복만으로 가득찼으면 좋겠고

혹여 눅눅한 땅을 밟을 때에도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나를 만드는 24년이 되었으면 한다.

 

감사합니다.